동천리의 유래와 남산 13곡

동천리의 자연은 본군에서는 보기 드문 (절성지)絶勝地와 유서(由緖)가 어린 곳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후 고을의 선비들이 남산계곡에 모여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 시제(時題)는 三聲(水聲, 風聲, 鳥聲)을 韻은 聲, 情子로 진왈(盡曰)토록 自然의 품속에서 自然을 사랑하고 아끼기를 수백년 바위에 많은 글을 새겨서 남겨 놓았다.

취암(醉岩)에 새겨진 많은 詩句를 대하면  자연과 우정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三聲과 情을 곰곰이 새겨보면 삼성이 자연의 소리가 아닌 다른 깊은 뜻이 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史官이 所信껏 사실을 사실대로, 옳은 일은 옳게, 붓은 거짓을 쓸 수 없다는 선비의 松竹같은 기질을 黑心과 權慾에 찬 政商輩들의 궤변(聲) 奸臣들의 소리(聲), 阿諂(아첨)배들의 소리(聲)를 합치면은 삼성이요 김종식(金宗植)선생의 문하(門下)의 선비들은 아무 세상사 소리(聲)도 듣기 싫었을 것이고 무고(無辜)하게 희생(犧牲)당한 동문들을 그리는 우정이 감추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선비 기질이 시구마다 넘쳐 흐르고 같은 門下生으로서 하소연할 곳 없는 심사(心思)의 찢어짐을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표현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선비들의 恨이 새겨진 남산계곡을 찾으면 찾을수록 선현(先賢)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물 좋고 바위 좋은 데다 수림(樹林)의 녹음(綠陰) 또한 좋은 곳에서 선현들의 청담고론(淸淡高論)하시던 광경이 떠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구를 대할 때 마다 물질만능 앞에 기질도, 예절도 사라져 가는 현대인의 종착점이 어떤 곳일까 아찔해 진다. 그렇다고 시대조류를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이 곳에 각남면 일곡리 출신의 최공 익주(翼周)선생이 산수정(山水亭)을 사재(私財)로 1893년 천중절(天中節)에 축조하여 향내(鄕內)의 사림(士林)들이 修契하여 선현들의 기질을 계승하여 봉화(奉和)선현(先賢)들의 韻대로 작시(作詩)하는 것을 바위에다 수(首)의 詩를 새겨 놓고 있다. 崔公의 기개(氣槪)를 본받을만 하다.

유지(遺志)를 이어 받은 최공이 가시자 풍상(風霜)에 견디다 못하여 도퇴 되고 유허지(遺墟址)만 남아 있다. 무심하게도 유허지에는 잡목과 잡초만 무성하여 행인들도 무심코 지나가기가 일쑤다.

남산계곡에는 13曲이 있다. 청도와 관계있는 곳을 몇 군데 소개하면은 다음과 같다.

1曲은 여기추(女妓湫) 또는 청수대(靑水台)라 한다. 원명은 청수대이나 임란 후에 부녀자들이 여름이면 피서차 입욕하려 많이 다니므로 사대부 부녀자가 낮에 입욕한다는 것은 예절상 있을 수 없다 하여 어떻게든지 막고자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아 선비들이 중지아 여기추(女妓湫)라. 하면 양반집 부인들이 기생과 동등하게는 되지 않으려고 입욕은 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었다. 과연 적중되었다. 이는 선비들의 글장난이라고나 할까.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曲인 녹수문(鹿脩門)은 녹피(鹿皮)를 상납할 시 수렵 군들이 이 곳에서 수령재를 지내고 사냥을 한 곳이다.

3曲음용지(飮龍池)는 한발(旱魃)때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일명 기우단이라고도 했다.

5曲 운금천(雲錦川)은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흡사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산수정이 있었다.

6曲취암(醉岩)에 많은 詩句가 새겨져 있어 무오사화 후 많은 선비들이 한을 달래던 곳이다.

12曲금사계(金沙界)는 속세(俗世)의 먼지를 털고 세심(洗心)하여 마음과 몸을 청정(淸淨)하게 하여 鳳林寺(신둔사)나 영은사(永恩寺)로 갔다는 곳이다.

13曲인 학소사(鶴巢祠)는 이 곳의 송림(松林)에 서식(捿息)하는 학을 보호하고 학을 벗으로 하며 학의 번식을 비는 사당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당은 없어지고 바위에 글만 새겨져 있다.

유서(由緖) 깊은 남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 이름도 몇번이나 바뀌었다.

이 高沙洞 → 玉井洞 → 陽川洞 → 東川洞으로 時代에 따라 바뀌었다.

고사동은 고려조시대로 추측되며 은왕(隱王)터의 높은 곳에서도 모래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옥정동은 조선시대의 동명이다 남산계곡의 계수(溪水)가 청담옥류(淸潭玉流) 한다고 동명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낙석대(洛石台)부근의 옥연소(玉漣沼) 仙女ㅇ등에 맑은 물 밑에 깔린 조약돌이 구슬 같다고 붙여졌다는 設도 있다.

양천동은 남산조양(南山朝陽)과 계천이 흐른다고 동명으로 했다는 것이다. 또한 양천동을 조산(朝山), 조산(造山)으로도 불리는 것은 아침해가 먼저 비치는 산 (南山)이라고 朝山, 그리고 이 곳에 造山이 있어 동제(洞祭)를 모셨다고 造山이라고 현재도 불리고 있다 音은 같으나마 뜻은 전연(全然) 다르다.

이 곳에 향교가 있었다가 고평리(古坪里)로 이건(移建)된 것은 계천변(溪川邊)에 있어서 둑이 침식되는 바람에 옮겨졌고 향교 자리에 造山을 만들고 동제(洞祭)를 모신 것은 훨씬 後代가 아닌가 싶다.

이 마을의 全盛時는 陽川洞時代다. 현재의 "금장배기"가 洞基로 附近에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어 고배 단경호, 장경호, 항아리 등의 파편이 산재해 있다.

양천동 당시는 큰 부자(副者)는 없어도 비교적으로 중산층이 많아 나름대로는 생활이 안정되었고 선비들도 있어서 향내(鄕內)에서는 꽤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한다.

동천동은 동헌(東軒)의 동쪽 계천가에 있다고 동천동이라 했고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한익공(漢益公)이 밀양군 상동면 평능리에서 이거택리(移居擇里) 하였다. 동천동에는 영은사(永恩寺), 신둔사, 사림사(沙林寺) 등이 있었으나 現在는 신둔사뿐이고 두 절은 유불정책(儒佛政策)의 일환으로 폐사(廢寺)되고 林木은 鄕校, 東軒, 客舍등에 活用 되었다는 것이다.

- <문헌발취: 청도문화지 1999년 4호 李弘益 글,> -

   

자료발취 :  청도향토사학회보(2001년8월11일자)

 

 남산골의 비경

남산골 폭포의 겨울   2002. 1. 6

 

시정골의 여름 2003. 9. 13,   겨울  2002. 1. 6

 

시정골의 맑은 물 (雲錦川 아래)

운금천 아래 있는 시정꼴의 맑은 물

 

 

 

 

 

 

용주골 폭포

 

 

신둔사 薪芚寺 (보조국사가 창건한 봉림사-고려 명종 3년)

화양 어제와 오늘하가네홈으로화양의 명소.명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