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SAY  PARIS  PRANCE ( 오르세이 박물관 )

오르세이 미술관에.는 1814∼1914년까지 서양 미술계를 지배했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중인 작품들은 이전에 루브르 미술관과 죄드뽐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작품을 이전한 것이다.

오르세이 미술관의 탄생으로 루브르에는 보다 많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 예술품의 전시공간이 늘어났고 죄드뽐 미술관은 당대 작가들의 특별전시공간으로 현대미술관은 보다 많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시대적으로는 루브르 미술관과 뽕삐두 센터를 잇는 역할을 하며, 작품 면에서는 일반인들이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인상파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유명하기로는 루브르 미술관이 으뜸이지만 전시작품의 친숙도에 있어서는 이곳을 따라갈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인지 오르세이 미술관은 파리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다녀가는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아울렌티 (Aulenti)가 설계한 아름다운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옛날에 플랫폼이었던 조각 전시실이 눈길을 끈다.

미술관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에 비해 작품수가 많고 또 대부분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작품이기 때문에 관람시간을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다.

오르세이 박물관 ( ORSAY ) :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이라 세평 높은 오르세이 박물관은 센강 좌편에 있다.  여기는 이전 1870년에 회계 검사원이 세워졌지만, 파리 코뮨시대에 파괴되고 그후 1898년 파리 올레앙 철도회사가 신역사 건축을 빅틀 라로에게 위탁했다. 공사는 2년으로 종료, 이미 만국박람회 1900년에는 신 오르세이역이 완성됐다.

ORSAY (오르세이) 박물관 내부 : 라로의 설계인 중앙 콘코스는 길이 135m, 폭 40m의 호화로운 것으로 철골구조 부분은 밝은 색의 장식 회 반죽으로 기묘하게 덮여 있다. 내부에는 16개의 플랫 폼뿐만 아니라 몇 개의 레스토랑 그리고,적어도 400실을 갖고 있는 엘레강스한 호텔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이래 방치되어 점점 황폐해져서 폐허가 되었다. 오손 웰즈영화 "심판"의 야외촬영지로 채용되고,또 쟝 루이 바로가 극장으로서 활용하는 등 재생의 시도도 공을 보지 못했다.

까뮤 피사로 (1831∼1903) - 붉은 지붕 : 인상파 화가 까뮤 피사로는 모네와 교류가 있고, 그후 세잔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1877년 이 최후의 세잔느와 체재를 같이 했다. 이 1877년에 그려진 인상파 수법의 가을의 풍경은 나무들의 낙엽이 떨어지고 수풀은 말라서 황색이나 적색으로 물들은 낙엽이 땅을 뒤덮고 있다 가지의 뒤틀린 사이로 작은 마을의 솟은 빨간 지붕이 엿보이고 이 구성은 딱딱하고 치밀함에서 불구하고 불안정한 빛이 통과하는 모양이 재빠른 텃치붓으로 그려져 있다.

앙리 토루즈 로트렉 (1864∼1901) - 광대 여자 챠우 카오 :   예술운동이나 학교에 메어 있지 않은 로트렉은 인상파 대표자 중에서 이와 같은 미술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폭풍우에서도 파리 시민의 소문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이 변형된 형태는 로칼의 몽마르트의 밤의 연기에 감춰져 한밤동안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그는 재빠르게 스켓치를 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다. 변화무쌍한 무대, 엘레강스한 사람, 언제나 오는 사람, 쟝 아브리르, 고류, 빨래하는 사람, 물랭르쥬의 프리마돈나가 된 발레리나, 유명한 발렌타인르 데조세, 차우카오 슬픔을 전하는 광대사, 현란스런 의상, 슬픔과 단념,여기에는 여배우의 화장하는 방이고 무 대의상을 벗어 풀어놓은 순간이 그려져  있다.

죠로쥬 슬러 (1859∼1891) - 서커스 :  슬러는 인상파 회화의 중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광학 또는 물리차이 발전한 시대에 예술도 또 과학적으로 고안된 결과로서 독특한 수법 없이 이뤄졌다. 의식적으로 두개의 색은 인접 시켜서 각각이 다른 색을 영향 끼치는 슬러는 점화 법 또는 점 묘법이라 불리는 테크닉을 창조했다. 이색의 점에 의해 캔버스를 덮어 매우 가벼운 느낌과 빛이 빛나는 효과적 표현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1890년의 독립 살롱에 출품되었다. 전람회 개최 중 3월에 슬러는 불의로 죽어버리고 색의 디자인은 평면에 불완전한 채로 남았다. 보통 예술가의 기술은 고도의 결과를 쫓아 나아간다. 미진한 황금 입자속에 침투한 딱딱한 마네킹 인형과 같은 인체가 플래쉬의 빛속에 고정되어 있다.

폴 세잔느 (1839∼1906) - 석류가 있는 정물  :   폴 세잔느는 근대 회화의 창조주이고 "인상파의 응집 "이라 불린다. 사실 그는 그리기 전에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 실지로 색과 면의 놀림에 의해 투시화법에 의한 깊이와 공간을 창조하고, 자유롭게 비교해서 개개의 공간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다면적으로 나눠진 부분은 각각 원근법이 지배하고 구성되어 선이나 색만이 아닌 것으로 창조되어 있다. 심플하게 색채와 서로 어울려서 세잔느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전형적인 작품이다

폴 고갱 (1848∼1903) - 타이티의 여인 :  고갱의 예술은 시민 생활에서 도피하여 생환이 보다 원시적인,보다 사실적으로, 좌나 성실한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기 묘함조차 있다. 시민에서 결별하고 가족, 자식들, 일을 버리고, 영광도 부도 거절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고갱의 매력적인 생활이다. 해안의 두사람의 여인 그림은 1891년에 그리고 그 얼마 후 고갱은 실제로 타이티에 도착했다. 이 체재 동안) 원시적 인 미술을 발표했다. 형태는 힘있고 견고한 평면적이고 자연의 야생적인 색채이다. 소홀히 할 수 없는 성실함을 캔버스 위에 표현했다.

빈센스 반 고호 (1853∼1890) - 오벨의 교회 :  반고호의 예술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무리다. 이 화가의 개성은 복잡하고 일반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져 짧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11890년 6월에  오벨 슬오와이즈에서 제작되었다. 예술가가 고뇌한 최후의 시기에 속한 작품이다. 반 고호는 사실 이 작은 촌락으로 도피했었다. 여기는 이미 세잔느나 피사로가 이전에 체재한 곳으로 산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후, 같은 해 5월에 여기에 왔다. 오벨에서는 극히  짧은 기간 평정을 유지했지만 곧 환각의 청랑함과 실의의 발작이 번갈아 계속되고 그리고는 광기가 되었다. 자매 월에게 쓴 "마을 교회의 큰 그림을 그렸다.

A Girl With a Watering Can
1876 (190 Kb); Oil on canvas, 100 x 73 cm (39 1/2 x 28 3/4 in);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Le palais d'Or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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